본문 바로가기

동양사상, 자연학, 유가, 공자 공부

공자와 예의 관계

공자와 예의 관계

공자와 예의 관계
공자와 예의 관계

예술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 바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살펴볼 것은 논어를 중심으로 해서 공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 언급들을 생각을 해 볼 텐데요. 어린 시절의 생활이라든가 여러 가지 자신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저는 논어에 제 일곱 번째 편이죠. 술이편에 맨 처음에 나오는 이 장을 집중해서 살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내가 터득한 옛날에 학술사상을 진술하여 후세에 전수하기만 하고 나 자신이 새로운 것을 지어내지는 않으며 옛날의 학술 사상을 좋아하니 이런 나 자신을 은근히 우리 노팽에게 비겨본다.라고 이야기한 내용인데요. 유종목 선생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해설을 하셨어요. 공자의 고전에 대한 슬파 그의 겸허한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원문을 보게 되면 술(述)이라든지 작(作)이라든지 이런 글자들은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그런 글자들이잖아요? 그중에서도 공자 자신이 나는 작하지 않고 술 하는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술의 목적어가 뭘까?를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다음 구절에 신이 호구라고 옛것, 옛날의 다양한 해석을 해 볼 수 있는 암시를 주고 있기는 한데요. 명확하지 않죠. 그리고 또 한 가지 공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또 한 가지 구절을 또 한 번 같이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논어』 「자한」에 나오는 공자가 광읍에서 두려움에 빠져있을 때 말씀하셨다. 문왕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의 문화는 여기, 나에게 전해져있지 않느냐?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버리려고 한다면 그 분보다 나중에 죽을 나 같은 사람이 이 문화에 동참하여 그것을 향유할 수 없었을 것이고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면 광인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하는 구절인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전에 술이편에서 술의 목적어가 무엇일까? 옛날이라고 고라고 하는 말을 생각을 해 보았는데, 좀 막연하잖아요? 막연하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뭘까?라는 것을 생각해보는 그런 맥락에서 이 구절을 한 번 선택해봤어요. 여기에 보면 공자는 이 문화, 그러니까 문왕으로부터 시작된 이 문화를 자기가 전달받고 그리고 그것을 또 후대에 전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사명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이때 문왕의 문화라는 것이 과연 뭘까? 이런 걸 생각해 볼 필요가 있죠. 공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옛날이라고 할 때, 옛날의 모든 것이 될 순 없겠죠? 그렇다면 범위를 조금 좁혔을 때, 적어도 문왕 이후에 형성되었던 과거의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것을 스스로가 자부하는 그런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런 추측을 좀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의 전문가

공자가 평생을 관심을 두고 배우고 또 익히고 했던 그런 것과 관련해서 『논어』에 보면 우리가 참고하기에 딱 알맞은 그런 구절이 하나 있죠. 그게 바로 「위정」에 나오는 구절인데요. 같이 한번 보시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는 천명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예순 살이 되어서는 귀가 뚫려 한번 들으면 곧 그 이치를 알았고, 일흔 살에는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죠.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각각의 연령대에 대해서 이립이다, 불혹이다, 지천명이다. 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우리가 아주 익히 잘 알고 있는 구절인데요. 물론 그런 것들을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같이 살펴보고 있는 내용과 관련해서 저는 제일 첫 구절, 오십 유 오이지 어학, 학에 뜻을 두었다. 이 말에 좀 주목을 하고 싶어요. 물론 지(志)라고 하는 것이 지향을 한다는 것이고요.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럴 때 우리가 같이 궁금해야 할 것이 배운다라고 하는 말, 만약에 배운다라고 하는 말에 목적어가 무엇일까? 무엇을 배우는데 뜻을 뒀을까?라고 하는 것에 우리가 초점을 맞춘다고 하면 공자의 평생 관심사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 이후에 일관되게 풀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자와 예

그것의 하나의 힌트가 되는,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구절이죠. 『논어』를 펴면 제일 처음에 나오는 구절이죠. 같이 한번 보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언가를 배우고 때맞추어 그것을 복습한다면 역시 기쁘지 않겠는가? 친구가 먼 곳에서 찾아온다면 역시 즐겁지 않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역시 군자답지 않겠느냐? 여기에서도 보자면 맨 첫 구절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고 시작되는데요. 마찬가지로 학 바로 다음에 학의 목적어가 분명하게 나와있지 않아요. 그다음에 시습 지라고 할 때 지라고 하는 대명사가, 대사죠. 등장하게 되는데 이 대사가 지칭하는 것도 명확하지가 않잖아요? 학의 목적어가 지인 것인지, 아니면 이 습이라고 하는 것의 목적어인지, 그렇다고 할 때 습의 목적어라고 한다면 배운 것을 익힌다가 되겠죠. 여전히 후자면 학이라고 하는 것, 배우고 나서 평생 관심을 가지고 지속해서 익혀나가는 것의 정체라고 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은데, 이 그림을 보시면 배운다고 하는 것의 목적어가 무엇인지, 또 공자가 평생 관심을 가졌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자의 어머니 안 씨, 안징재, 이름이 징재라고 되어있는데요. 안징재가 어린 공자를 교육하는 장면을 그려놓고 있어요. 그런데 어린 공자를 보면 어떤 것을 하고 있느냐 하면 제사상을 차리고 있는 모양이죠. 제(祭)라고 하는 것은 예(禮)라고 하는 예의라고 할 때, 예라는 것의 한 가지 종류잖아요? 그러니까 공자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예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을 가졌고, 또 예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문헌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노력들이 뒤따라야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학이시습지라고 할 때 습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 새가 끊임없이 날갯짓을 연습하는 그런 것을 본떠서 만든 글자라고 하죠. 그러니까 이런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끊임없이 익혀나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테고요. 단시일에 가능한 것도 아니죠. 그래서 아까 우리가 위정 편에서 보았던 삼십이립이다는 것은 공자가 그 나이에 걸음마를 시작했다는 말은 아니겠죠? 그러니까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몫을 해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의미가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오랜 기간 동안 자기 몸으로 실천을 통해서 내재화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칠십에 가게 되면 종심소욕 불유구라고 하는 자기 마음대로 해도 예의 규범을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이런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볼 수가 있죠. 그럴 때 예라고 하는 이야기를 왜 이 예술이라고 하는 것을 주제로 하는 이 강좌에서 이렇게 강조를 할까? 하는 것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어요. 예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뒷부분에서 살펴보겠지만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성격들을 유가의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사상에서 가장 예술과 가까운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린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자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또 그것에 걸맞게 자기 자신이 직접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평생을 노력해 왔는지에 관한 것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예라는 것인데, 예라는 것을 우리가 예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강좌에서 먼저 이야기하는 이유는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갖추어야 할 그런 요소들이 유가의 가장 근본이 되는 이론들 속에서는 바로 이 예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