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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상, 자연학, 유가, 공자 공부

공자의 이상 경계와 유가 예술론의 영향

공자의 이상 경계와 유가 예술론의 영향

공자의 이상 경계와 유가 예술론의 영향
공자의 이상 경계와 유가 예술론의 영향

즐거움으로 가득한 경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논어(論語)』의 구절이 있죠. 「선진(先進)」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인데요. 우리에게는 욕 기장(浴沂章)이라고,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하는 그런 구절로 유명하죠. 이 앞부분에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각자의 포부를 밝히는데 반해서 증점이라고 하는 제자는 사뭇 다른 포부, 내지는 바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같이 보도록 할게요. 공자가 증점에게 물었어요. “점아 너는 어떤 것을 원하느냐?”하고 물어보시자 하시자 점은 슬을, 악기를 타기를 늦추어 멈춘 다음 퉁 하며 악기를 내려놓고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앞에 세 사람이 여러 가지를 잘 갖추어서 훌륭하게 대답한 것과는 다릅니다”라고 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슨 걱정이냐? 이 또한 각자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자 증점이 대답했다. “늦은 봄에 봄옷을 잘 차려입고 갓을 쓴 어른 대여섯 명 및 아이들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세수하고 무에서 바람을 쐰 다음 노래를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공자께서 와하고 찬탄하며 말씀하셨다. “나는 점의 말에 찬동 하노라. ” 여기까지 인데요. 이 내용을 보면 평소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유롭게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서 자유롭게 노니는 이런 경지를 공자가 추구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볼 수 있겠죠. 바로 이러한 정신이 중국의 후대에 예술론에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는데요. 그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만 더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북송 때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인 문여가, 원래 이름은 문동이죠. 문 여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마무리를 해 볼까 합니다. 문 여가의 고상한 인격과 소박하고도 품위 있는 태도는 대나무를 그리는 기본 조건이라고 여겨져요. 그의 대나무 그림은 바로 자신이 대나무로 변화해서 자기의 정신을 대나무를 통해서 그려 놓은 것이라 칭송을 받았는데요. 이런 자연에 대한 사랑과 자연에 융합된 상태에서 붓을 놀릴 때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묘사하진 않겠죠. 합일된 그런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서 자연스럽게 자유분방한 풍조를 띠는 양식으로 드러났을 텐데요. 하지만 문 여가의 분방함이라고 하는 것은 법도를 따르면서 점차 법도를 망각하게 된 것이지, 법도를 벗어난 것은 아니죠. 이 부분을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데 맨 처음에 예라든지 또 예술과 관련해서도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요. 예라고 하는 것도 처음에는 엄격한 규정을 따라서 천천히 점점 자기 자신에게 내재화시켜나가는 과정이고, 그 끝에 가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건데, 예술에 있어서도 후대에 예술 이론에 있어서도 같은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거죠. 법도를 따르면서 점차 법도가 자기 내부에 내면화되면서 의식하지 않게 되는, 그럼으로써 얻게 되는 자연스러움, 자유, 이런 것들을 후대에 강조하게 되는데, 틀림없이 이런 것들은 공자로부터 면면이 이어져오는 유가의 예술정신이라고 할까 이러한 것이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술의 예

이제 예술이라고 할 때, 예(藝)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요. 예와 관련해서도 여러 군데 나와있지만 이 구절을 같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나오는 구절인데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고, 인에 의지하고, 육예에 노닐어라. ” 이때 육예라고 하는 말을 예라고 표현하고 있죠. 예라고 하는 것을 보시면 맨 마지막에 유어예(游於藝)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예에서 노닌다. 또는 육예에서 노닌다라고 풀어볼 수가 있을 텐데, 여기에서 먼저 유라고 하는 말은 자유롭게 구사한다.라고 하는 의미이죠. 이때의 예는 아직 예술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이전이기 때문에 공자 당시의 어법, 용법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자면 육예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육예는 예, 악, 사, 어, 서, 수 여섯 가지를 지칭하는 것인데, 당시의 지배 계층의 구성원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었고요. 이런 것들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지 지배 계층의 구성원으로서 제 구실을 하는 그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가운데 맨 앞에 보면 예가 나오는데요. 예가 예술이라고 할 때의 예, 육예의 한 가지로 들어가 있는 까닭은 예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는 의식이라든가 예에 필요한 기구들 그릇들 이런 것들을 사용하는 방법이라든가 여러 가지 등, 또 예에 참여할 때 우리가 입어야 할 복식이라든가, 굉장히 다양한 일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처리하고, 좌우로 선회하고 굽어보고 위로 향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 등과 같이 일련의 세밀하고도 엄격한 규정을 포함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익히고 장악하는 데는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악

그리고 예악이라고 하는 것도 악(樂)이라고 하는 것도 육예에 포함되어 있는데, 악이 육예에 포함되는 까닭도 악기의 연주와 같이 물질적인 도구를 숙련하고 기능을 습득하도록 요구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거예요. 예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악이라고 하는 것 등이 후대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서예라든지 회화라든지 음악이라든지 무용이라든지 다양한 예술을 떠올릴 수가 있는데, 이러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는 예술에서 요구하는 기술을 습득하고 숙련하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을 때, 자기가 원하는 예술들을 창작할 수도 있고 감상할 수도 있는 이런 경지에 오르게 되는 거죠. 이런 점에서 볼 때, 예라고 하는 것,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궁극에 가서는 일종의 자유감을 낳는다라고 하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조금 더 추가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악과 관련해서 이런 구절이 있어요. 「태백(泰伯)」에 나오는 말인데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시를 통하여 일어나고 예를 통하여 확립하고 음악을 통하여 완성했다. ” 그러니까 이것에 대해서도 보자면 공자의 수양과 학문의 세 가지 단계를 설명한 말인데, 이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보면 악에서 완성하였다.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바로 앞에서 유어예라고 하는 말을 통해서 마지막에 궁극적인 경지에 가게 되면 예와 통하는 그러한 경지에 오르게 된다. 그러니까 칠십에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했다는 경지로 볼 수 있는 거고요. 유어예에서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객관적인 법칙, 또 그런 것을 숙련을 통한 자유의 체득, 이런 것에 가깝다고 한다면 성어악이라고 하는 것은 내재적으로, 악이라고 하는 것이 즐거운 마음에서 나온다라는 이야기를 많이들 하잖아요? 그런 것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내재적 심리의 자유로운 형성에 더 가까울 수 있겠다고 하는 거죠. 성어악이라고 할 때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헌문(憲問)」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데요. 「헌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요. 자로가 완성된 인간에 관하여 여쭈어보자 공자께서 “장 무중의 지혜와 공작의 무욕과 변장자의 용기와 염구의 재주를 예악으로 장식한다면 그 역시 완성된 인간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완성된 인간을 이야기하는데, 이때도 마지막에 예악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죠. 또 “오늘날의 완성된 인간이야 어찌 꼭 그래야만 하겠느냐? 이익을 보면 의로운 것인지를 생각하고, 위태로운 사태를 보면 목숨을 내놓으며, 오래 전의 약속일지라도 옛날에 한 말을 잊지 않는다면, 이 역시 완성된 인간이 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이런 구절이 있어요. 이 구절의 내용을 다시 한번 우리가 풀어보자면 군자가 수양하면서 예약을 배워 익히지 않는다면 완성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유어예, 앞에서 이야기했던 유어예가 외재적인 객관적 법칙을 파악해서 자유를 얻는 즐거움인 것에 반해서 성어악으로 도달하는 자유의 즐거움, 내재적인 즐거움이라고 했는데요. 이런 자유의 즐거움은 내재화된 심령, 그러니까 감정과 욕구에 관련된 법칙, 규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진정한 자유의 경지는 바로 실천적 기예, 아마도 실천적 기예라고 하는 말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은데, 예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고 이런 실천적 기예를 통한 자유라고 하는 것이 공통점이 되겠죠. 이런 실천적 기예의 규칙을 파악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더한층 자유를 실천하는 인생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죠. 이러한 경지는 즐거움이 가득한 경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