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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상, 자연학, 유가, 공자 공부

중국 예술의 고(古) 취미

중국 예술의 고(古) 취미

중국 예술의 고(古) 취미
중국 예술의 고(古) 취미

유가의 예술관과 관련해서 고라고 하는 예스러움, 오래됨이라고 하는 것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떠올려주는 것이 아득한 옛날, 오래됨 이러한 것들을 떠올려주게 하죠. 중국 사람들이 고라고 하는, 옛날, 오래됨이라는 것을 숭상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조상숭배의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관심이 그런 경향성이 생겼다고 이야기를 하죠. 사상적으로 볼 때는 아득한 옛날, 태고라고 하는 것은 근원, 그런 것을 떠올리게 하고요. 또 자연 그러고 또 그런 점에서 소박이라는 것 등 이런 것들을 떠올리게 해요.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지금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을 떠올려주기 때문에 현실이라든가, 또는 현실을 지배하는 여러 원리들로부터 벗어난 그런 어떤 경계를 떠올려주기도 하죠.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의 고, 옛날이라고 하는 이런 개념은 아무래도 유가 자체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도가라든가 선종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죠. 이런 유가의 그런 것과 대비하기 위해서 먼저 도가라든가 선종의 영향을 받은 그런 중국 예술의 고의 취미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 예술은 예스러움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예술 작품의 제발(題跋)에서는 늘 고아(古雅)라든지 창고(蒼古)라든지 혼고(渾古), 순고(醇古), 고망(古莽), 황고(荒古), 고담(古淡), 고수(古秀)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예술작품을 평가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전통문화를 숭상하는 중국의 기풍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오해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스러움”은 고대(古代)라고 할 때의 “고(古)” 그러니까 시간적인 과거, 물리적인 시간으로서의 고가 아니다. “예스러움”을 숭상하는 것은 옛날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런 것도 아니죠. 그 안에 드러나 있는 것은 중국 예술의 독특한 취미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영원함에 대한 추구로, 순간과 영원에 대한 오묘한 깨달음의 경계를 예술에 적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는 거죠. 단적으로 한 가지 예를 들면요. 청나라 화가 대희(戴熙, 1801-1860)라는 사람은 자기 작품의 제발(題跋)에서 다음과 같이 썼어요. “아무도 없는 험한 산, 말없이 흐르는 장강, 황량한 숲 속의 오래된 사찰, 홀로 하늘을 나는 외로운 새, 저녁 무렵 또렷하게 보이는 돛단배는 사람의 마음을 탁 트이게 한다. ” 여기서 대희가 말하는 것은 그림의 경계이자 또 대희 자신이 깨달았던 깨달음의 경계인데요. 여기에서는 공간을 초월하고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아득히 멀리 떨어진 그 세계는 사람이 홀로 초연하게 서 있는 느낌을 상징한다. 시간도 응고되어 들쭉날쭉한 고목(古木)과 오래된 사찰이 풍기는 엄숙함은 사람의 심리를 아득히 먼 옛날로 데려간다. 현재와 아득한 옛날은 거대한 공백 지대를 구성하고 “예스러움 [古]”을 통해 사람의 현재에 대한 집착을 빼앗고 현재 시간의 허구성을 부정하며, 또 현재의 직관과 아득한 과거의 대조, 현재와 과거의 화면의 중첩을 통해 영원은 지금 이곳에 있고, 지금 이곳이 바로 영원이라는 마음의 체험을 창조한다. 영원은 시간의 눈금이 아니라 무시간적인 것이다. 현재는 “지금 이 시각”이 아니고 무 시각이다. “탁 트임 [豁]”은 밝은 것인데, 사람의 마음은 현재 영원의 돈오(頓悟), 순간적인 갑작스러운 깨달음 가운데 단번에 밝아져서, “무명(無明)”으로부터 “밝음 [明]”을 향해 가며, 외물과 자아가 절대로 같아질 수 없는 간섭이 존재하지 않는 “고요함[寂]”으로부터 자연과 저절로 조화를 이루고 그 하늘의 조화 신비를 고취하는 경계를 향해 간다. 이 대희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고, 예스러움이라는 경계를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술론에서 보이는 고(古) 취미

예스러움과 관련해서 우리가 좀 조심해야 될 부분은요. 중국예술과 관련해서, 중국 예술은 항상 고를 이야기 하면서 수, 수라고 하는 것은 봄에 새싹이 처음 돋아날 때를 가리키는 말이잖아요? 바로 수와 결합시킨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청나라 때 성대사(盛大士, 1771-?)는 『계산 와 유록(溪山臥游錄)』에서 명나라 말 화가 운향을 평하면서 “예스럽고 고아하며 고졸하고 빼어나다. ”라고 할 때, 빼어나다고 하는 게 바로 수죠. 또 주량공(周亮工)은 『독 화록(讀畵錄)』에서 진홍수(陳洪綬)의 그림을 평하면서 “예스럽고 윤택하며 깨끗하다. ”라고 하여 그림을 그릴 때는 “예스러움을 다하는 가운데 빼어남이 있어야 한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또 청나라 때 왕욱(王昱)은 『동장 논화(東莊論畵)』에서 그림 그릴 때 “붓의 운용은 예스럽고 빼어나야 한다.”라고 또 생각을 했던 거죠. 이렇게 중국 예술에서 조각배는 언제나 아주 오래된 바위에 매어져 있고 푸른 잎은 대부분 성긴 가지, 무성한 가지가 아니라 성긴 가지에 돋아난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는 대부분 마른 것에서 빼어남을 보고 생각한다. 늙은 매화 분재를 예로 들면, 뿌리는 마른 등걸과 비슷하고 가지는 구불구불하며 화분에는 수척함 [瘦], 뚫림 [漏], 투명함 [透], 주름짐 [縐]의 운치를 보이는 태호석이 함께 있어서 정말로 변화가 많고 아득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쇠락함 속에서 푸른 잎사귀 한두 개가 두드러져 보이고 작은 꽃 서너 개가 피어 있으면 또 그 나름의 특별한 풍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태호석 가운데 하나죠. 소주에 유원이라고 하는 원림에 있는 관음봉이라는 태호석인데요. 이 태호석의 자태를 보면서 도가적인, 불교의 선종의 영향을 받은 오래된 이 형상이 어떤 것인지 생각을 같이 좀 해보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