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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상, 자연학, 유가, 공자 공부

유가의 예술과 아(雅)의 의미

유가의 예술과 아(雅)의 의미

유가의 예술과 아(雅)의 의미
유가의 예술과 아(雅)의 의미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의 예술과 관련해서 아(雅)라고 하는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볼 텐데요. 아의 사전적 의미는 별도로 제공되는 자료를 통해서 보시면 될 것 같고요. 아의 의미, 예술과 관련된 의미, 그리고 역사적으로 아라고 하는 개념이 어떻게 수용되어 왔는지를 같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고대의 아 자는 하(夏)라는 글자와 통했는데 이 하라고 하는 글자는 중원, 중국의 민족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고요. 왕조의 소재지였습니다. 그래서 하성, 하의 소리를 아성이라고 칭했고, 아성은 바로 올바른 소리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죠. 량치차오는 「석사 시명의(釋四詩名義)」라고 하는 글에서 아음은 바로 하음으로 중원의 올바른 소리를 일컫는다라고 했죠. 시경에 보면 풍, 아, 송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악조에 따라 구분한 세 가지 시가 체제라고 전해지고 있고요. 그중에서도 풍은 제후국의 지방 악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대부분 민간의 토속 가요다. 아는 왕조, 궁정의 정통 악조로 주 왕조가 직접 통치한 지역의 귀족 또는 관리가 지은 것이라고 하고요. 송은 종묘 제사의 악가라고 전해지는데 고대의 아악이라든지 아무, 봉건 제왕이 천지와 조상에 제사 지내고 조정에서 하례하거나 연회를 베풀 때 널리 채택된 예술 형식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술미의 최고 모범 '아'

역대 유가 사상가들도 그것들을, 풍, 아, 송, 그중에서도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아와 관련해서 예술미의 최고 모범으로 받들었고 그 표현방식이 전아(典雅)하고 순정(純正)하며, 그 표현 내용은 중정(中正)하고 화평(和平)하다고 평가를 했어요. 그리고 역대 중국의 봉건 통치자도 이 예를 따라서 예악을 제작하고, 왕조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예악을 제정하고 조상의 공덕을 노래했다고 하죠. 그런데 이 아라고 하는 것이 중국 고대 문예 미학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곳이 어디냐 하면 『주례(周禮)』 「춘관(春官)」에 나오는 육시설(六詩說)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 육시설의 본문을 살펴보면 “태사(太師)가 육시(六詩)를 가르치는데 풍(風), 부(賦), 비(比), 흥(興), 아(雅), 송(頌) 이렇게 여섯 가지”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각각에 대해서 현대에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장병린이라고 하는 학자의 해석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장병린(章炳麟)은 육시가 고대의 여섯 가지 상이한 운문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가운데 풍, 아, 송은 가창할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것이고 반면에 부, 비, 흥은 운문으로 쓰여 있긴 하지만 기록으로만 쓰여 있고 노래로 부를 수 없는 운문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춘추 시기에 풍, 아, 송은 여전히 보존되었지만, 운문으로서의 부, 비, 흥은 점점 도태가 되었고, 결국에는 후대에 부, 비, 흥은 사람이 시가를 창작할 때 동원하는 방법, 그러니까 일종의 수사법에 대한 명칭이 되었죠. 그러니까 부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고, 비와 흥은 비유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나라의 문헌

이런 생각은 우리가 한나라 때의 문헌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가 있는데, 한나라 때의 「모시서(毛詩序)」는 '춘관, 주례 춘관'의 육시설을 기초로 해서 “시육의(詩六義)”라는 논술을 제시했어요. 아울러 그 구체적인 함의에 대해서 확실하게 밝혔는데, “…한 나라의 일을 한 사람의 근본과 연계한 것, 그러니까 개인적인 일을 말하는 것을 풍이라 하고, 천하의 일을 말하고 사방의 풍속을 형용한 것을 아라 한다. 국가적인 차원이 되겠죠. 그리고 아라고 하는 것은 바르다는 말이고, 왕정 흥폐(興廢)의 이유, 연유(緣由)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에는 작고 큰 것이 있으므로, 천자의 정치가 있는가 하면 지방 제후의 정치가 있는 거죠. 예를 들면 그런 거죠. 거기에 맞춰서 아도 대아가 있고 소아가 있고, 마지막으로 송이라고 하는 것은 융성한 덕의 모습을 미화하여 그 성공을 신명에게 고하는 것인데, 주로 왕조가 성립되기 이전에 조상들의 덕을 신명에게 고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죠. 이상의 것들을 사시(四始), 시의 가장 기본이 되는 네 개의 출발점이라고 해서 사시라고 하며 이런 것들이 시의 극치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모시서에서. 여기에서 문학 개념으로서의 '아'는 이미 문예 체재론, 양식이죠. 풍이라고 하는, 송이라고 하는, 아라고 하는 체제가 있고 그것이 기술하는 내용은 대부분 왕조의 정치와 유관하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럽게 문예의 정치 교화를 중심으로 하는 그러니까 유가의 가장 대표적인 예술론이라 할 수 있는데요. 정교(政敎) 중심론을 떠받드는 유가 학자에게 시 창작에 있어서 대표적인 성취, 가장 최고의 모델로서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詩)의 아(雅)

유가 사상이 국가의 종교처럼 작동하고, 가장 강력한 일종의 통치 정신, 또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던 한나라가 패망하고 나서 들어서게 된 나라가 위진을 비롯해서 남북조에 해당되는 나라들이죠. 이 위진 시기가 시작할 때, 조비는 조조의 아들인데요. 조비는 “주(奏)와 의(議)는 전아 해야 하고, 서(書)와 론(論)은 논리적이어야 하며, 명(銘)과 뢰는 사실적이어야 하고, 시(詩)와 부(賦)는 아름다워야 한다. ”라는 문장 요지를 제시했어요. 그러니까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황제에게 올리는 서신이나 주표(奏表)와 같은 양식의 글은 규범에 맞아야 하고, 또 전아 해야 하고, 그 표현방식이, 그리고 또 담겨있는 내용은 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죠. 이때 아(雅)라고 하는 것은 한 가지 문체에 대한 창작에 있어서, 그러니까 주와 의라고 하는 문체에 대한 창작에 있어서의 특수한 요구가 된 거죠. 이런 것들은 “아 해야 된다”라는 이런 식으로 요. 동시에 일 종 한 미학적 함의, 가치와 관련된 이러한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볼 수가 있어요. 위진 남북조 후기에 유협이라는 사람은 『문심조룡(文心雕龍)』 「체성(體性)」에서 아를 또 다른 의미를 가지도록 제시하고 있는데, 아를 작가 개인의 습성이나 미적 취미의 표지로 보고 있죠. 그 원문을 보자면 “재주에는 용렬함과 준수함이 있고, 기운에는 굳셈과 부드러움이 있으며, 배움에는 깊음과 얕음이 있고, 또 습성에는 아(雅)와 정(鄭)이 있다. ”라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유가의 이런 가치와 관련해서 아와 정의 구분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유명하죠. 공자가 악을 굉장히 좋아했고, 또 상당한 전문가이기도 했는데, 이 아악을 굉장히 중시하고 공자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정나라 위나라의 음악에 대해서는 아주 음란하다고 하면서 추방해야 된다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바로 그러한 구분법에서 따온 것인데, 습성, 작가가 몸에 익히고 있는 습성에도 이런 아한 것이 있는가 하면 정한 것이 있다. 아라고 하는 것은 아까 바르다라는 것이잖아요? 어지럽고 음란한 습성이 있다.라고 해서 이 아라고 하는 것이 작가와 습성과 관련된 서술어로써, 평가어로써 사용될 수 있게 해 줬어요. 그에게 시문의 아정함과 음란함의 구분은 개인의 미적 취향의 구별이었다고 볼 수 있죠. 다른 한편으로 살펴보자면 위진 시기에 유가의 경학이 한나라의 폐해를 목격한 뒤이기 때문에 나날이 쇠락하고, 문벌 사족의 이데올로기인 현학이 관방(官方) 철학이 되었죠. 이 현학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이 관방의 전통 관념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를 숭상하고 속을 비하하는 것도 그들이 미학 관념에서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라고 하는 것은 뿌리가 유가에서 나온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야기할 완적(阮籍)이라는 사람은 죽림칠현의 대표라고 알려져 있는, 그리고 또 술을 좋아하고 했다고 하는 것은 유가의 윤리라든지 삶의 방식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사람으로 알려져 있잖아요? 그런데도 그런 완적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어요. “정악, 그러니까 아악이죠. 아악이 폐하여지자 정성, 정나라의 음악이 크게 흥했다. 아와 송 같은 시가 입에 오르지 않고 요사하고 음란한 곡이 잇달았다. 아악이 두루 통하게 되면 만물이 화합하게 될 수 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봉건 사회 상부 정치의 수요에 부합한 아악은 만물을 화합시키고 중화의 미로 향하는 근본적인 경로로 떠받들어졌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뭐냐 하면 왜 아라는 것이 봉건시대의 지배 계층의 필요에 부합했냐는 거죠. 아라고 하는 것이 바르다라는 거고요. 바르다라는 것의 기준은 예라는 것에서 오는 거죠. 그래서 아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지난 차시에 살펴보았던 예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어요.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현대 화가가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죽림칠현이 자연을 벗 삼아서, 세속을 떠나 자연을 벗 삼아서 자유롭게 지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를 강조하는 아의 정신을 그대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좀 주목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